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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물 스민 손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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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물 스민 손끝

규장각 서리가 책과 말로 역사를 살아내는 하루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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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날이었다. 나는 규장각 한쪽 자리에서 붓을 빨며 중얼거렸다.

"이 문장, 어디에 두지? 왕이 읽으실 텐데."

옆자리 형원이 웃으며 말을 걸었다.

"야, 너 또 혼잣말이냐. 책만 보면 사람 말을 안 들어."

"형원 형, 이거 그냥 글이 아니에요. 선조들이 남긴 숨결이에요."

"숨결은 무슨. 먹물이지. 밥이나 먹자, 배고프니까."

나는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형이 몰라서 그래요. 이 글자들이 쌓이면 역사가 돼요. 훗날 누군가 우리 손을 떠올릴 거라고요."

오후가 되자 하급 관리가 문을 열고 소리쳤다.

"오늘 안으로 이 책을 마저 정리하거라. 실수 없이."

"예, 알겠습니다."

문이 닫히자 형원이 작게 투덜댔다.

"우리도 사람이라고. 하루가 너무 길어."

나는 붓을 다시 쥐며 말했다.

"길어도 괜찮아요. 역사는 거대한 전쟁이 아니에요. 이런 작은 손끝에서 시작되는 거니까."

저녁 무렵, 빗소리가 창을 두드렸다. 나는 마지막 장에 점을 찍고 혼잣말을 남겼다.

"언젠가 이 기록이 누군가의 밤을 밝혀 주겠지. 그럼 오늘 내 하루도 헛되지 않은 거야."

형원이 어깨를 두드리며 웃었다.

"너 진짜 이상하다. 그래도 덕분에 내가 책을 조금은 다르게 보게 됐어."

나는 미소를 지으며 등불을 껐다. 먹물 묻은 손이 따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