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붓을 든다. 먹이 종이에 스민다.
나랏말씀이 중국과 달라. 그 첫 줄을 따라 쓴다. 글자가 흔들린다. 내 손도 흔들린다.
오백 년 전 밤이 떠오른다. 촛불 아래 왕이 앉았을 테다. 백성의 입을 생각했다. 말하지 못하는 설움을 생각했다. 하늘과 땅과 사람 사이. 그 빈자리를 메울 소리를 빚었다.
나는 교실에 앉아 있다. 볼펜으로 같은 구절을 옮긴다. 선생님은 필사라 하셨다. 나는 되살림이라 부르고 싶다.
우리말이 천대받던 시절. 한자 투성이 공문서 앞에서 고개를 떨구던 사람들. 그들의 하루가 눈에 밟힌다. 장터의 할머니. 논두렁의 농부. 글자 없이 세상을 읽어야 했던 눈빛들.
세종은 그들을 보았다. 높은 자리에서 낮은 곳을 내려다본 것이 아니다. 같은 숨결로 바라본 것이다. 그래서 스물여덟 자가 태어났다. 쉬우면서도 깊은 소리의 집.
먹물이 또 번진다. 잘못 쓴 획을 고친다. 역사가 이렇게 고쳐지기도 했을까. 아니. 역사는 지워지지 않는다. 다만 다시 읽힐 뿐이다.
오늘 내가 베낀 문장 하나가 내일 누군가의 숨이 된다. 우리는 그렇게 이어진다. 글자로. 마음으로. 끊이지 않는 강물처럼.
창밖으로 해가 기운다. 붓을 놓는다. 손끝에 아직 세종의 온기가 남아 있는 듯하다. 나는 조용히 페이지를 덮는다. 그리고 우리말로 생각한다. 고맙다고.